
| “ 두 번은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다 ” 생년월일 : 1895년 10월 17일 출생지 : 함남 홍원군 홍원면 남송리 162번지 순교일 : 1950년 6월 28일 순교지 : 서대문형무소(납치된 후 행방불명) 직분 : 목사 교단 : 예수교장로회 |
김경종은 함경남도 홍원 태생으로 일찍 교회에 들어와 믿음이 깊어지면서 교역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래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교역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래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교회를 담임하였다. 두메산골교회를 순회하면서 교역자로서의 훈련을 쌓았다.
1930년대에 함응운흥리교회 목사로 청함을 받아 목회하면서 그 역량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는 천성이 온유하고 겸손하고 침착하고 인자하고 지혜가 있는 목사로서 존경을 받았다. 운흥리교회 목회 중에는 일본 동경에 가서 1년간 연구하고 오기도 했다.
그는 1919년의 민족독립운동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늘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아왔다. 그들이 미일전쟁을 일으킨 후에는 조선민족에 대한 학정이 더욱 심한 중에 교회지도자들에게 대한 박해는 더욱 자심하였다. 1944년에 이르러 그들은 함흥에서 교계지도자 십여 명이 검거될 때 그도 함께 검속되었다. 잔인한 고문을 하여 동부교회 김연목사가 헌병대에서 죽고 다른 몇 사람은 병들어 나와서 죽을 때 그도 거의 죽게 된 몸으로 나오게 되었다.
민족해방이 되고 뜻밖에 38선이 생기고 북한에서는 무신론 공산주의가 교회와 교인들을 탄압하는 것이 일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여기 더 머물러 있을 수 없어 6.25 발발 2년 전인 1948년 자유의 땅 서울로 월남하게 되었다. 서울에 와서는 후암교회를 맡아 2년간 시무하였다.
교회도 점차 발전하며 목회자로서 기쁨을 느끼고 희망을 가지고 일하던 중 1950년 6.25사변이 터졌다. 사변이 터진지 사흘 만인 6월 28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서울에 침입하게 되니 시민들은 피난에 혼비백산이었다. 이 때 그의 가족들은 피난을 가자고 하나 그는 교회와 뭇 교인들을 생각하는 나머지 가족들만 한강변까지 피난시켰다.
1950년 8월 23일 공산군은 전국 교역자 체포령을 발동하고 서울 시내에 잔류한 목사들을 일제히 검거해 서대문형무소에 감금해 버렸다. 김목사도 강단에서 엎드려 기도하다가 공산당에 납치되어 끌려갔다. 후일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북한 함경도 아오지탄광에서 복역하는 것을 본 사람이 많다는 풍문만이 있었다.
김경종은 함경남도 홍원 태생으로 일찍 교회에 들어와 믿음이 깊어지면서 교역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래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교역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래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교회를 담임하였다. 두메산골교회를 순회하면서 교역자로서의 훈련을 쌓았다.
1930년대에 함응운흥리교회 목사로 청함을 받아 목회하면서 그 역량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는 천성이 온유하고 겸손하고 침착하고 인자하고 지혜가 있는 목사로서 존경을 받았다. 운흥리교회 목회 중에는 일본 동경에 가서 1년간 연구하고 오기도 했다.
그는 1919년의 민족독립운동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늘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아왔다. 그들이 미일전쟁을 일으킨 후에는 조선민족에 대한 학정이 더욱 심한 중에 교회지도자들에게 대한 박해는 더욱 자심하였다. 1944년에 이르러 그들은 함흥에서 교계지도자 십여 명이 검거될 때 그도 함께 검속되었다. 잔인한 고문을 하여 동부교회 김연목사가 헌병대에서 죽고 다른 몇 사람은 병들어 나와서 죽을 때 그도 거의 죽게 된 몸으로 나오게 되었다.
민족해방이 되고 뜻밖에 38선이 생기고 북한에서는 무신론 공산주의가 교회와 교인들을 탄압하는 것이 일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여기 더 머물러 있을 수 없어 6.25 발발 2년 전인 1948년 자유의 땅 서울로 월남하게 되었다. 서울에 와서는 후암교회를 맡아 2년간 시무하였다.
교회도 점차 발전하며 목회자로서 기쁨을 느끼고 희망을 가지고 일하던 중 1950년 6.25사변이 터졌다. 사변이 터진지 사흘 만인 6월 28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서울에 침입하게 되니 시민들은 피난에 혼비백산이었다. 이 때 그의 가족들은 피난을 가자고 하나 그는 교회와 뭇 교인들을 생각하는 나머지 가족들만 한강변까지 피난시켰다.
1950년 8월 23일 공산군은 전국 교역자 체포령을 발동하고 서울 시내에 잔류한 목사들을 일제히 검거해 서대문형무소에 감금해 버렸다. 김목사도 강단에서 엎드려 기도하다가 공산당에 납치되어 끌려갔다. 후일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북한 함경도 아오지탄광에서 복역하는 것을 본 사람이 많다는 풍문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