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난을 상급으로 여긴 순교자” 생년월일 : 1898년 1월 17일 출생지 : 전라남도 신안군 순교일 : 1950년 10월 5일 순교지 : 전라남도 신안군 직분 : 장로 교단 : 장로교 |
이판일장로는 전남 신안군 임자면 진리에서 이화국의 자녀로 태어났다. 이판일은 1911년 같은 면에 살고 있는 임소애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이판일보다 두 살 위였다. 이판일은 한때 술에 빠져 세월을 보냈는데 당시 가정에는 불행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터졌다. 1931년 문준경(文俊卿) 전도사에 의해 진리교회가 설립되었다. 문준경 전도사는 진리마을에 살고 있는 정태성의 방 한 칸을 얻어 기도회를 시작한 것이 교회가 되었다. 이때 이판일의 어린 자녀들이 아버지를 전도하였다. “아버지 교회에 나가세요, 교회에 가기만 하면 술과 담배는 끊을 수 있습니다.” 이판일은 그렇게 좋아하던 담배대를 두 동강 내어 아궁이에 던져 버렸고, 술을 끊고 새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이판일의 변화에 놀란 마을 사람들도 덩달아 진리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당시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양석봉 전도사는 새벽마다 이판일과 그의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였다. 이판일의 동생 이판성도 형의 변한 모습을 보고는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되었다.
때마침 신안군에 속한 여러 섬을 순회하면서 세례식이 진행된다는 소식을 들은 진리교회 교인들도 세례받을 준비를 하고있었다. 당시 신안군의 성결교회 당회장은 목포 북교동에 있는 목포 북교동교회 이성봉 목사였다. 이성봉 목사의 집례로 이판일과 이판동 형제가 나란히 앉아 세례를 받게 되었다. 형제는 진리교회의 기둥이 되었으며, 교회 일이라면 발벗고 앞장을 서곤 했다. 교회를 신축할 때 재산의 일부를 선뜻 내어 놓았으며, 추수감사절이 돌아오는 날이면 아예 동리 잔치를 베풀어 예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등 그들의 선행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판일은 진리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할 때 가장 표를 많이 받고 장로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이판일 장로의 앞에도 고난의 길이 나타나게 되었다. 하루는 임자도 파출소의 일본 경찰관이 통지서를 하나 가지고 왔다. 그는 그 통지서만 던져주고는 떠났는데 이상한 예감이 든 이판일이 그 통지서를 개봉해 보았더니, 앞으로 일본 천황(天皇)이 살고 있는 동경(東京) 쪽을 바라보고 인사를 한 후에 예배를 드리라는 내용이었다. 이판일 장로는 동경을 바라보고 인사하는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 통지서를 부엌 아궁이의 뜨거운 불길 속에 넣어 살라버렸다. 얼마 후 경찰관이 긴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은 채 예배 중인 교회당에 들어왔다. 그런 경찰을 향해, “이보시오, 이곳은 하나님이 계신 신성한 교회당입니다. 신발을 벗으세요”라고 이판일이 말했다. 얼마간의 신경전을 벌였지만 결국 일본 경찰은 고개를 숙인 채 파출소로 돌아갔다. 예배가 거의 끝날 무렵 다시 경찰관이 진리교회에 나타났다. "내일 암태 파출소로 출두하시오. 그 내용이 이 봉투 안에 담겨 있소.” 경찰관은 그 봉투를 전하고는 쏜살같이 교회 마당을 빠져 나가버렸다. 이판일 장로는 교회당에서 잠시 기도하고는 파출소로 향하였다. 이 장로는 파출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손을 들고 “할렐루야”를 외쳤다. 일본경찰은 “할렐루야”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고, 이 장로는 하나님께 인사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판일 장로는 조사를 받을 때마다 고대가(苦待歌)를 불렀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결국 이판일 장로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유로 목포 경찰서에 구속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평안하였고 싱글벙글 웃기까지 하였다. 경찰은 그가 미쳤다고 판단하고 석방하여 내보냈다. 그는 목포에 장남 이인재의 집에가 요양하면서 “나같이 비천하고 못난 인간을 위해 주님께서 모진 고문과 핍박을 당하셨는데, 내가 이렇게라도 주님 사랑을 만분지일이라도 갚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쁘고 영광스러워서 싱글벙글 웃음이 나오더라. 내 속을 알 수 없는 형사는 내가 미쳤다고 여겼는지 혀를 끌끌 차더니 집으로 가라고 석방해 주더구나.” 밝혔다.
이판일 장로가 집으로 돌아온지 얼마 안 되어 일본은 망하고 말았다. 이판일 장로는 동리마다 돌아다니면서 “조선이 해방이 됐습니다”라고 외치며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협력해 주어야 한다”고 면민들을 설득하고 나섰다. 이 일로 진리교회는 부흥했다. 그러나 얼마 후 6·25전쟁이 일어났고 임자도도 공산군이 점령을 하게 되었다. 이판일 장로는 교회를 지키겠다며 피난가지 않았다. 그는 “설사 내가 화를 당한다 할지라도 주를 위한 것이라면 뭘 주저하겠느냐?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순교를 각오하였다.”고 단호하였다. 10월 4일 수요일 저녁예배시간, 교회당은 이미 빼앗겼지만 이장로 집에 48명의 교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빨갱이들이 날뛰는 상황 속에서 예배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알지만 순교를 각오 한 것이다. 드디어 그들이 왔다. “이 악질 반동 새끼들! 한 놈도 남김없이 다 죽여 버리겠어. 하지만 마지막으로 딱 한번 기회를 주지.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 있으면 손들고 나와 그러면 살려주지. 자, 시간 없다. 빨리 나와!” 그러나 한 사람도 손들고 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손만 들면 살 수 있었는데도.... 죽음을 각오한 성도들은 그들이 이끄는 대로 3km 앞 갯벌로 끌려갔다. 체포된 암태 면민들은 생매장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판일 장로와 진리교회 교인들은 마지막까지 “하나님,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저들도 하나님의 백성이고 대한민국의 백성들입니다”라고 기도했다. 이판일 장로는 진리교회 교인들 43명과 순교했다.
이판일장로는 전남 신안군 임자면 진리에서 이화국의 자녀로 태어났다. 이판일은 1911년 같은 면에 살고 있는 임소애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이판일보다 두 살 위였다. 이판일은 한때 술에 빠져 세월을 보냈는데 당시 가정에는 불행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터졌다. 1931년 문준경(文俊卿) 전도사에 의해 진리교회가 설립되었다. 문준경 전도사는 진리마을에 살고 있는 정태성의 방 한 칸을 얻어 기도회를 시작한 것이 교회가 되었다. 이때 이판일의 어린 자녀들이 아버지를 전도하였다. “아버지 교회에 나가세요, 교회에 가기만 하면 술과 담배는 끊을 수 있습니다.” 이판일은 그렇게 좋아하던 담배대를 두 동강 내어 아궁이에 던져 버렸고, 술을 끊고 새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이판일의 변화에 놀란 마을 사람들도 덩달아 진리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당시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양석봉 전도사는 새벽마다 이판일과 그의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였다. 이판일의 동생 이판성도 형의 변한 모습을 보고는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되었다.
때마침 신안군에 속한 여러 섬을 순회하면서 세례식이 진행된다는 소식을 들은 진리교회 교인들도 세례받을 준비를 하고있었다. 당시 신안군의 성결교회 당회장은 목포 북교동에 있는 목포 북교동교회 이성봉 목사였다. 이성봉 목사의 집례로 이판일과 이판동 형제가 나란히 앉아 세례를 받게 되었다. 형제는 진리교회의 기둥이 되었으며, 교회 일이라면 발벗고 앞장을 서곤 했다. 교회를 신축할 때 재산의 일부를 선뜻 내어 놓았으며, 추수감사절이 돌아오는 날이면 아예 동리 잔치를 베풀어 예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등 그들의 선행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판일은 진리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할 때 가장 표를 많이 받고 장로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이판일 장로의 앞에도 고난의 길이 나타나게 되었다. 하루는 임자도 파출소의 일본 경찰관이 통지서를 하나 가지고 왔다. 그는 그 통지서만 던져주고는 떠났는데 이상한 예감이 든 이판일이 그 통지서를 개봉해 보았더니, 앞으로 일본 천황(天皇)이 살고 있는 동경(東京) 쪽을 바라보고 인사를 한 후에 예배를 드리라는 내용이었다. 이판일 장로는 동경을 바라보고 인사하는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 통지서를 부엌 아궁이의 뜨거운 불길 속에 넣어 살라버렸다. 얼마 후 경찰관이 긴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은 채 예배 중인 교회당에 들어왔다. 그런 경찰을 향해, “이보시오, 이곳은 하나님이 계신 신성한 교회당입니다. 신발을 벗으세요”라고 이판일이 말했다. 얼마간의 신경전을 벌였지만 결국 일본 경찰은 고개를 숙인 채 파출소로 돌아갔다. 예배가 거의 끝날 무렵 다시 경찰관이 진리교회에 나타났다. "내일 암태 파출소로 출두하시오. 그 내용이 이 봉투 안에 담겨 있소.” 경찰관은 그 봉투를 전하고는 쏜살같이 교회 마당을 빠져 나가버렸다. 이판일 장로는 교회당에서 잠시 기도하고는 파출소로 향하였다. 이 장로는 파출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손을 들고 “할렐루야”를 외쳤다. 일본경찰은 “할렐루야”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고, 이 장로는 하나님께 인사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판일 장로는 조사를 받을 때마다 고대가(苦待歌)를 불렀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결국 이판일 장로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유로 목포 경찰서에 구속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평안하였고 싱글벙글 웃기까지 하였다. 경찰은 그가 미쳤다고 판단하고 석방하여 내보냈다. 그는 목포에 장남 이인재의 집에가 요양하면서 “나같이 비천하고 못난 인간을 위해 주님께서 모진 고문과 핍박을 당하셨는데, 내가 이렇게라도 주님 사랑을 만분지일이라도 갚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쁘고 영광스러워서 싱글벙글 웃음이 나오더라. 내 속을 알 수 없는 형사는 내가 미쳤다고 여겼는지 혀를 끌끌 차더니 집으로 가라고 석방해 주더구나.” 밝혔다.
이판일 장로가 집으로 돌아온지 얼마 안 되어 일본은 망하고 말았다. 이판일 장로는 동리마다 돌아다니면서 “조선이 해방이 됐습니다”라고 외치며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협력해 주어야 한다”고 면민들을 설득하고 나섰다. 이 일로 진리교회는 부흥했다. 그러나 얼마 후 6·25전쟁이 일어났고 임자도도 공산군이 점령을 하게 되었다. 이판일 장로는 교회를 지키겠다며 피난가지 않았다. 그는 “설사 내가 화를 당한다 할지라도 주를 위한 것이라면 뭘 주저하겠느냐?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순교를 각오하였다.”고 단호하였다. 10월 4일 수요일 저녁예배시간, 교회당은 이미 빼앗겼지만 이장로 집에 48명의 교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빨갱이들이 날뛰는 상황 속에서 예배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알지만 순교를 각오 한 것이다. 드디어 그들이 왔다. “이 악질 반동 새끼들! 한 놈도 남김없이 다 죽여 버리겠어. 하지만 마지막으로 딱 한번 기회를 주지.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 있으면 손들고 나와 그러면 살려주지. 자, 시간 없다. 빨리 나와!” 그러나 한 사람도 손들고 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손만 들면 살 수 있었는데도.... 죽음을 각오한 성도들은 그들이 이끄는 대로 3km 앞 갯벌로 끌려갔다. 체포된 암태 면민들은 생매장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판일 장로와 진리교회 교인들은 마지막까지 “하나님,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저들도 하나님의 백성이고 대한민국의 백성들입니다”라고 기도했다. 이판일 장로는 진리교회 교인들 43명과 순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