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한국인 최초의 신학박사 ” 생년월일 : 1882년 7월 1일 출생지 : 서울 순교일 : 1950년 8월 23일 순교지 : 납북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
남궁혁은 1882년 7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뼈대 있는 양반 가문출신이었던 그는 어려서는 평양감사인 외조부 임씨를 따라가 평양 감영에서 자랐다. 일찍부터 한문을 읽었던 그는 장로회신학교 교장직을 끝까지 고사했으며 남궁혁목사 그는 배재학당에 나가기 전 1896년 백일장에서 장원급제를 할 만큼 총명했으며 배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목포세관장까지 했다. 이때 남궁혁은 언더우드와 에비슨 선교사의 부탁으로 정신여학교 교장에게 명문집안 규수를 소개받게 하였다. 기독교인이 되어 사랑방을 빌려주어 한국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게 한 김윤방의 딸 정신출신 김함라와 결혼했다.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실력 있는 인재들이 속속 모여 들어 김성수, 김병호를 비롯해 장면박사의 부친이 그의 제자였다. 영어실력은 천부적이어서 미국사람보다 우수하다는 평을 받았고 선교사들은 그를 미국에 보내 프린스턴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게 했고 이어서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해 평양신학교 교수로 취임해 교수하랴 성경주석 번역하랴 신학지남의 편집 책임까지 맡아 동분서주하였다.
그는 옹졸한 학자가 아니었다. 명문가 양반답게 인격적이고 후배들을 친히 이끌어주어 길을 얼어주는 아량 넓은 이었다. 그래서 박형룡박사도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으로 그가 미국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을 때 평신의 교수직을 마련해 주었고 김재준박사가 가난한 문사로 떠돌 때 사재를 털어서 양식을 도왔고 이성휘 송창근박사의 후원자로 진로를 열어줌으로 한국교회에 활기를 찾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1938년 신사참배 반대하다가 신학교가 폐교조치당하고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곧장 상해로 망명해 거류민단장이 되어 교포들의 생활을 돌아보며 함께 눈물흘리고 위로를 하며 살다가 해방이 되어 1946년 동포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하에서 정부의 적산관리처장으로 부임하여 공무를 집행하다가 재무세관국장 목포 세관장 재무부 세관국장직을 연이어 수행하게 되었다. 2년간의 공무원직을 사임하고 한국교회협의회 총무직을 수행하고 평양노회장에서 총회장(21대)까지 역임하였다.
항일운동으로 일경에 쫓기는 이승만을 집에 숨겨주고 해외로 방명시키기까지 한 그였지만 그는 이승만 정권하에서도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교회연합일에 묵묵히 헌신하다가 6.25를 만나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일설에 의하면 "공산주의는 지상낙원"이라고 대공방송을 강요했지만 입을 다물고 물조차 먹지 않는 금식을 하다가 쓰러져 아름다운 순교를 했다고 한다.

남궁혁목사가 장로와 목사로 시무하던 당시의 양림교회 모습
남궁혁은 1882년 7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뼈대 있는 양반 가문출신이었던 그는 어려서는 평양감사인 외조부 임씨를 따라가 평양 감영에서 자랐다. 일찍부터 한문을 읽었던 그는 장로회신학교 교장직을 끝까지 고사했으며 남궁혁목사 그는 배재학당에 나가기 전 1896년 백일장에서 장원급제를 할 만큼 총명했으며 배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목포세관장까지 했다. 이때 남궁혁은 언더우드와 에비슨 선교사의 부탁으로 정신여학교 교장에게 명문집안 규수를 소개받게 하였다. 기독교인이 되어 사랑방을 빌려주어 한국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게 한 김윤방의 딸 정신출신 김함라와 결혼했다.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실력 있는 인재들이 속속 모여 들어 김성수, 김병호를 비롯해 장면박사의 부친이 그의 제자였다. 영어실력은 천부적이어서 미국사람보다 우수하다는 평을 받았고 선교사들은 그를 미국에 보내 프린스턴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게 했고 이어서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해 평양신학교 교수로 취임해 교수하랴 성경주석 번역하랴 신학지남의 편집 책임까지 맡아 동분서주하였다.
그는 옹졸한 학자가 아니었다. 명문가 양반답게 인격적이고 후배들을 친히 이끌어주어 길을 얼어주는 아량 넓은 이었다. 그래서 박형룡박사도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으로 그가 미국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을 때 평신의 교수직을 마련해 주었고 김재준박사가 가난한 문사로 떠돌 때 사재를 털어서 양식을 도왔고 이성휘 송창근박사의 후원자로 진로를 열어줌으로 한국교회에 활기를 찾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1938년 신사참배 반대하다가 신학교가 폐교조치당하고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곧장 상해로 망명해 거류민단장이 되어 교포들의 생활을 돌아보며 함께 눈물흘리고 위로를 하며 살다가 해방이 되어 1946년 동포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하에서 정부의 적산관리처장으로 부임하여 공무를 집행하다가 재무세관국장 목포 세관장 재무부 세관국장직을 연이어 수행하게 되었다. 2년간의 공무원직을 사임하고 한국교회협의회 총무직을 수행하고 평양노회장에서 총회장(21대)까지 역임하였다.
항일운동으로 일경에 쫓기는 이승만을 집에 숨겨주고 해외로 방명시키기까지 한 그였지만 그는 이승만 정권하에서도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교회연합일에 묵묵히 헌신하다가 6.25를 만나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일설에 의하면 "공산주의는 지상낙원"이라고 대공방송을 강요했지만 입을 다물고 물조차 먹지 않는 금식을 하다가 쓰러져 아름다운 순교를 했다고 한다.
남궁혁목사가 장로와 목사로 시무하던 당시의 양림교회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