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자전거를 타고 제주목회순회를 한 제주출신 1호 목사 ” 생년월일 : 1892년 9월 13일 출생지 : 제주시 순교일 : 1948년 4.3사태 시 순교지 : 제주시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
이도종은 1892년 9월 13일 제주시에서 태어나 부친 이덕연(李德年)과 모친 박열선의 장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읽고 선비행세를 하였다. 관읍장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고 세인의 귀여움과 부러움을 샀다. 1908년 이도종이 17세에 제주도 선교사 이기풍목사를 만나 예수를 믿었다.
1915년 4월 25일 이기풍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이도종은 이기풍목사의 소개장을 들고 평양에 가 숭실중학교에 입학, 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평양신학교에 입학, 1926년에 20회로 졸업 후 1927년 1월 13일에 강도사 인허를 받았고 1927년 6월 26일에 전북 김제중앙교회에서 안수 받아 제주1호목사가 되었다.
이도종은 신학교에 가기 전 1910년 협재교회 전도사로 시무했고 졸업 후 1924-1925년까지 제주시 삼양교회의 전도사로 시무, 신학교를 졸업한 직후부터 전라북도 김제로 가 성말, 신풍, 대송, 판교, 월봉교회 전도사로 자전거를 타고 2~3킬로씩 떨어진 교회들을 시무하였다. 김제 성말교회에 시무당시 미국선교사가 와서 설교를 하면 이도종목사가 통역하곤 하였다. 일제의 교회탄압으로 교역자들 대부분이 제주를 떠나 교역자가 거의 없었던 터라 이목사는 새벽부터 교회를 찾아가 인도하고 밤이 늦어서야 귀가했다.
이목사는 신풍리에 중앙교회를 세우고 목회할 무렵 한 결혼식 주례사 중에 시국관련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잡혀가기도 하였다. 계속된 일본경찰의 압력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김제에서 제주로 들어와 1929년 성읍, 신풍, 1931년 서귀, 법환, 1933년에는 중문교회 1934-35년에는 표선, 35-36년은 남원교회에서 시무하였다. 성읍이나 표선교회에서 시무할 때에 공회당에서 시국강연을 하던 중 갑자기 일경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강연을 중지시키고 이목사와 주최자들은 함께 연행되고 삭발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1937년에는 7월 9일에 고산교회에 4대목사로 취임하고 가까운 용수, 두모, 조수교회도 맡아 시무하다가 1945년 9월 2일에 사임하는 등 제주노회 중심인물이 되었다. 1948년에는 인성(현 대정교회)과 화순교회 전도목사로 시무하고 김제중앙, 서귀포, 남원 등 10교회를 설립하는 등 이목사가 위임 또는 전도목사로 목회한 교회를 포함 21개 교회에 이른다.
1937년 남원교회 시무당시 제6대 노회장에 선출되는 등 총 4회 노회장을 맡았다. 이목사는 제주지역에서의 종교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직접 만주 상해까지 가서 모금을 해서 제주시 서문골 부근에 제주성경학원을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1948년 한라산에서 공산 무장 폭도(남노당)가 난을 일으킨 제주도 4.3사건시기에 자전거에 성경과 찬송을 싣고 화순교회로 예배인도하기 위해 떠난 이도종목사는 산속에서 폭도들에게 미국인의 스파이로 몰려, 행방불명 됐던 화순교회 이집사 포함 10명과 함께 심히 맞고 크게 파놓은 구덩이에 생매장당하여 56세에 순교하였다.

이도종목사 전신사진

제주 대정교회

이도종목사의 한문 설교원고(190편중)


4ㆍ3사건 당시 산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며 순교한 이도종목사가 시무했던 대정교회 앞마당에 위치한 기념비

목숨을 담보로 3천여 지역민들을 살려낸 조남수목사 공덕비./모슬포교회 제공









예장 대정교회 현재 모습(2005년 현재 35년전 건축, 최초의 교회는 초가집 교회)
이도종은 1892년 9월 13일 제주시에서 태어나 부친 이덕연(李德年)과 모친 박열선의 장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읽고 선비행세를 하였다. 관읍장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여지고 세인의 귀여움과 부러움을 샀다. 1908년 이도종이 17세에 제주도 선교사 이기풍목사를 만나 예수를 믿었다.
1915년 4월 25일 이기풍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이도종은 이기풍목사의 소개장을 들고 평양에 가 숭실중학교에 입학, 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평양신학교에 입학, 1926년에 20회로 졸업 후 1927년 1월 13일에 강도사 인허를 받았고 1927년 6월 26일에 전북 김제중앙교회에서 안수 받아 제주1호목사가 되었다.
이도종은 신학교에 가기 전 1910년 협재교회 전도사로 시무했고 졸업 후 1924-1925년까지 제주시 삼양교회의 전도사로 시무, 신학교를 졸업한 직후부터 전라북도 김제로 가 성말, 신풍, 대송, 판교, 월봉교회 전도사로 자전거를 타고 2~3킬로씩 떨어진 교회들을 시무하였다. 김제 성말교회에 시무당시 미국선교사가 와서 설교를 하면 이도종목사가 통역하곤 하였다. 일제의 교회탄압으로 교역자들 대부분이 제주를 떠나 교역자가 거의 없었던 터라 이목사는 새벽부터 교회를 찾아가 인도하고 밤이 늦어서야 귀가했다.
이목사는 신풍리에 중앙교회를 세우고 목회할 무렵 한 결혼식 주례사 중에 시국관련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잡혀가기도 하였다. 계속된 일본경찰의 압력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김제에서 제주로 들어와 1929년 성읍, 신풍, 1931년 서귀, 법환, 1933년에는 중문교회 1934-35년에는 표선, 35-36년은 남원교회에서 시무하였다. 성읍이나 표선교회에서 시무할 때에 공회당에서 시국강연을 하던 중 갑자기 일경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강연을 중지시키고 이목사와 주최자들은 함께 연행되고 삭발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1937년에는 7월 9일에 고산교회에 4대목사로 취임하고 가까운 용수, 두모, 조수교회도 맡아 시무하다가 1945년 9월 2일에 사임하는 등 제주노회 중심인물이 되었다. 1948년에는 인성(현 대정교회)과 화순교회 전도목사로 시무하고 김제중앙, 서귀포, 남원 등 10교회를 설립하는 등 이목사가 위임 또는 전도목사로 목회한 교회를 포함 21개 교회에 이른다.
1937년 남원교회 시무당시 제6대 노회장에 선출되는 등 총 4회 노회장을 맡았다. 이목사는 제주지역에서의 종교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직접 만주 상해까지 가서 모금을 해서 제주시 서문골 부근에 제주성경학원을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1948년 한라산에서 공산 무장 폭도(남노당)가 난을 일으킨 제주도 4.3사건시기에 자전거에 성경과 찬송을 싣고 화순교회로 예배인도하기 위해 떠난 이도종목사는 산속에서 폭도들에게 미국인의 스파이로 몰려, 행방불명 됐던 화순교회 이집사 포함 10명과 함께 심히 맞고 크게 파놓은 구덩이에 생매장당하여 56세에 순교하였다.
이도종목사 전신사진
제주 대정교회
이도종목사의 한문 설교원고(190편중)
4ㆍ3사건 당시 산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며 순교한 이도종목사가 시무했던 대정교회 앞마당에 위치한 기념비
목숨을 담보로 3천여 지역민들을 살려낸 조남수목사 공덕비./모슬포교회 제공
예장 대정교회 현재 모습(2005년 현재 35년전 건축, 최초의 교회는 초가집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