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종 섭 ( 朴 宗 燮 , 1925 ~ 1954 )

“ 예수십자가를 생각하며 탄원서를 올리다 ”
생년월일 : 1925년 12월 7일
출생지 : 전남 영광군 서면 보사리
순교일 : 1954년 1월 24일
순교지 : 영동 구세군병원
직분 : 참위
교단 : 구세군


박종섭은 1925년 12월 7일 전라남도 영광군 서면 보사리에서 아버지 박용안과 어머니 탁화녀의 1남 2녀 중 외동아들로 정읍에서 자랐다. 정읍에는 1927년 양만석사관이 개척한 구세군영이 있었는데 박종섭의 부친은 바로 이 군영의 독실한 성도였다. 그는 부모의 신앙을 따라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생활여유가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학문하는 법을 가르쳐서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뜻이 있어 직장가기를 포기하고 교회에서 운영하던 야학을 운영하다가 8.15해방을 맞았다. 

1948년 정연순과 결혼한 그는 이듬해 1949년에 동부인해 사관학교를 입학하고 그 이듬해 1950년 6월 27일에 졸업을 하고 예산군 대흥면 상종리 구세군사관으로 임명받았다. 아침에 임명을 받은 박사관은 이미 한강다리가 끊어지자 광나루로 하여 나룻배를 타고 도강피난민들과 합류하여 남으로 걸어서 내려갔다. 예산읍내로 빠져 들어갔을 때 기관총을 든 인민군대로부터 붙잡혀 박참위 내외는 임지에 부임해보지도 못하고 예산내무서에 구금돼 버렸다. 

내무서 취조실에서는 벌써 많은 애국지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잡혀와 매일같이 고문으로 비명과 단말마의 외마디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박종섭도 회유를 강요받았지만 일편단심 예수만 외치며 주님만이 살길이라고 오히려 전도하였다. 다행히 고문을 하던 사람이 이북에서 예수를 알던 사람이라 내무서에 갇혀 고문을 받던 2개월이 되었을 때에 박참위를 방면하며 몸조심하라고 했다. 

박참위는 내무서에서 나와 1950년 9월말 대흥영에 부임했다. 그런데 그날 밤에 대흥분주소 지방대원들이 총을 메고 찾아와 장운용사관의 행방을 물었다. 박참위가 모른다고 하자 몽둥이로 두들겨팼다. 박참위는 몇 번이고 혼절한 후에 들것에 실려 대흥령에 도착했으나 보름을 정신을 읽고 앓았다. 

1950년 10월 초순 서울이 수복이 되고 충서지방을 관활하던 전용섭지방장관이 박참위를 찾아와보고 예산군수를 엄히 항의하고 범인을 색출하여 엄벌할 것을 명했다. 며칠 후 공산당원들이 줄줄이 잡혀 와 박참위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그들의 부모들도 통곡하며 빌었다. 그 모습을 본 박참위는 예수십자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탄원서를 경찰서에 올렸다. 

박참위 내외는 대흥영을 위해 열심을 다하면서 전후식량이 악화되어 굶으면서도 상부로부터의 보조를 받지 않았다. 박참위의 몸의 병은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1953년 구세군 본영에서는 박사관을 강계영문 담임으로 전보 발령했다. 

박사관은 영문을 돌보며 마침 한창 건축 중인 초강영 신축에 매달리고 성치 않은 몸을 끌고 건축일을 하다가 1953년 12월 20일에 쓰러져 서둘러 영동 구세군병원으로 입원했으나 1954년 1월 24일 병원에서 소천했다. 주치의는 죽음에 이른 근본적인 이유를 태장의 족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충남 예산구 대흥영에서 공산당원들에게 무수히 맞아서 고병으로 끝내 순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