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창 덕 ( 金 昌 德 , 1908 ~ 1951 )

“ 목양지 갈산교회를 지킨 순교자 ”
생년월일 : 1908년 2월 3일(음)
출생지 : 평남 안주군 용화면 용달리
순교일 : 1951년
순교지 : 안주감옥에서 석방 후 체포당한 뒤 행방불명
직분 : 목사
교단 : 예장


김창덕은 1908년 2월 3일(음) 평남 안주군 용화면 용담리에서 진주 김씨 김순묵씨의 다섯 아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고 소학교만을 졸업하고 부친의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는 이옥녀와 결혼은 했으나 자신의 앞날에 아무런 서광도 없자 자포자기로 술을 입에 대게 되고 술로 인해 병들어 임종이 임박한 무렵, 그의 처 이옥녀는 결혼 후 맏동서의 권유로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고 그는 경건한 기독교인이었던 친모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병원에 와서 "먹고 싶은 것은 없느냐?"고 아들의 손을 쥐자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귀에 "아버지, 저 마지막으로 예수나 믿다 죽고 싶습니다."하는 뜻밖의 말을 했다. 그는 들것에 실려 마침 용담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고 있는 김익두목사의 설교를 듣고 안수기도를 받은 후 쾌차하여 열심 있는 성도가 되었다.

아버지에게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가 "이 놈이 정신차려라 네 나이가 몇 살인줄 아느냐 네겐 두 아이가 딸렸어 분수를 알아야지"하는 야단을 맞고 고민하다가 아버지의 금고를 열고 20원(쌀 한가마니 1원 50전)거금을 흠쳐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배달을 하며 낮에는 중등교육과정을 마치자 만주에서 정미소를 하는 형이 학비를 보내 동경제대 교육학과에 다니면서 신학을 공부해1942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김창덕은 명분 없는 전쟁을 위해 일본의 총알받이가 되고 싶지 않아 하얼빈으로 망명가서 재만 동포들을 위해 뜨거운 전도활동을 해 개척교회를 설립했다.

맏아들 동남을 하얼빈으로 불러 교육을 시키는 중 8.15해방을 맞아 아들과 함께 귀국하여 안주군 대림면 만성리교회 담임전도사로 시무하다가 1946년 안주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갈산면 갈산교회로 부임했다.

강양욱의 기독교도연맹이 김일성 정권을 호도하기 위한 꼭두각시임을 간파한 김목사는 가입을 거절함으로 공산당 잠입자로부터 교회설교를 사찰당하고 사택을 엿듣고 여차하면 투옥시키겠다는 음모로 갈산교회 김영수를 시켜 교회를 떠나주기를 강권하고 박해하며 국민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주일날 소년단에 안 나온다며 폭력을 쓰기도하였다. 김목사는 동료목회자들의 잦은 월남권유도 완강히 거절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장남 동남과 함께 감금되었다가 김목사는 안주감옥으로 보내졌다. 1950년 9월 28일 국군의 진격으로 풀려난 김목사는 1951년 1월 4일 후퇴 시 공산군에 체포되어 끌려간 후 소식이 없으니 그의 나이 43세였다.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내 김창덕목사순교기념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