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진 하 ( 金 鎭 河 , 1920 ~ 1950 )

“ 북녘 땅 부토리영을 지킨 구세군사관 ”
생년월일 : 1920년 10월 3일
출생지 : 경북 영덕군 석포면 화매동
순교일 : 1950년 11월
순교지 : 황해도 연백읍
직분 : 구세군 사관
교단 : 구세군


김진하는 1920년 10월 3일 경북 영양군에서 아버지 김덕규와 어머니 서봉기 사이에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구세군이 개전할 초기에 입신한 신도들이었다. 1908년 한국에 구세군이 들어오고 이듬해인 1909년에 이미 대구에 지방영이 개설되었다. 영남지역 영양땅 화매리에 구세군영이 들어선 것은 1914년 10월 26일이었다.

화매리영 초등교육을 받은 김진하는 가난하여 와세다대학 발행 중학가정통신강의록으로 독학을 한지 4년 만에 1938년에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화매리영의 담임사관의 도움 특히 영어지도를 받았다. 향학열에 불타는 그는 상해에만 건너오면 고학을 할 수 있다는 상해의 친척의 편지 한 장을 받고 상해로 가서 중국집 사환으로 일하면서 중국어를 익혀 1942년 중국계 신문에 기자로 입사를 했다.

그가 기자로 활동할 땐 국제정세가 매우 복잡할 때였다. 중일전쟁의 승리로 중국령 상해에는 일장기가 흩날렸고 모택동의 공산당에 대결해서 왕조명이 국민정부를 결성하고 일본 독일 이태리가 세계를 상대로 제2차 대전을 일으켜 국제도시 상해는 썰렁하기만 했다. 바쁜 신문사 일에 쫓기다보니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대학 한번 못가보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 해방을 맞게 되었다.

서둘러 귀국한 그는 1946년 유예필과 결혼하고 2년간을 고향 영문에서 봉사하다가 1948년 10월 1일 부인과 함께 구세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49년 8월 27일 임관을 하고 황해도 해룡면 부토리영 담임 사관으로 파송을 받았다. 그가 부임해 영문은 부흥되고 병사의 수가 날로 더하던 중 1950년 6월 25일 민족전쟁으로 부득이 철수 할 수밖에 없어 서울에 올라와 사관학교에서 대기 생활을 했다.

1950년 9월 28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육작전이 성공하면서 유엔군이 북으로 전진하게 되자 김 참위는 먼저 가서 수습하는 대로 소식을 전해주겠다고 하고 서둘러 부토리로 갔으나 해가 저물 무렵 중공군 인해전술로 전세가 바뀌어 국군이 후퇴하게 되어 교인들에게 내일 저녁 6시까지 황해도 연백읍으로 모이라고 60리 눈보라길을 걸어 모였으나 몇 가정이 노부모가 있어 늦는 다는 기별이 왔다. 김사관은 며칠 후 정동에서 만나자고 하며 교인들을 먼저 보내고 연백에 남았으니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김사관은 인민군에 포로가 되었고 인민군은 중국어 하는 김사관이 필요했다. 전쟁이 끝난 후 납북된 김사관의 생사를 알아보려했으나 끝내 생사가 확인되지 않아 순교자로 추모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