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상 현 ( 金 尙 鉉 , 1882 ~ 1948 )

“민족의 아픔을 함께 한 순교자”
생년월일 : 1882년
출생지 : 평안북도 철산
순교일 : 1948년
순교지 : 평북 용천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김상현 목사는 1882년 평안북도 철산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에는 평북 용천군 용암교회에서 마포삼열 선교사 조사로 활동하였고 1909년 평북 선천 신성학교를 제 1회로 졸업하였다. 방효원 선교사는 김상현 목사에 대하여 "그의 신앙과 근면에 대하여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였다. 당시에 20대가 된 김상현 목사는 만학도로서 신교육을 받으며 지식을 쌓아나간 한편 양전백 목사, 휘트모어 선교사 등을 통해 신앙의 깊이를 더해갔다. 

이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주기철 목사 등과 함께 신학을 공부하면서 민족의 영혼을 구원하는 구령운동과 나라를 구하는 독립운동이 자신이 나아가야할 길임을 다시 확인하였다. 192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평안북도 철산군과 용천군에서 시무하면서 노회장으로 노회를 섬겼다. 

그는 한편 1919년 3월 31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정주 장날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이 일 때문에 일제에 검거돼 같은 해 7월 7일 평양 복심법원에서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2년 6개월을 복역했다. 

1945년 8월 15일 평북 용천 대성교회에서 사역하던 중 해방을 맞은 김 목사는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피란을 떠나지 않고 교인들과 함께 북한에 남았다. 공산주의가 신앙과 배치된다고 판단한 김 목사는 공산당의 협조 요청을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1948년 교회를 습격한 폭도들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한 김 목사는 후유증으로 투병하다 결국 목숨을 잃었다.
김상현 목사는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으로, 광복 후에는 공산주의 세력과 싸우면서 압제에 저항하며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삶으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