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길 수 ( 金 吉 洙 , 1905 ~ 1947 )

“ 위대한 진리의 굴복자 ”
생년월일 : 1905년
출생지 : 평남 용강군 양곡면
순교일 : 1947년 4월 10일
순교지 : 평양신암교회시무 중 보위부연행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김길수는 1905년 평안남도 용강군 양곡면의 다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고향에서 소학교를 마치는 대로 그를 일본으로 보내 와세다대학 중학부에 진학을 시켰다. 그러나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민족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의식 있는 청년 학도들 간에는 민족의식에 눈을 떠서 민족운동에 몸 바치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고향에 돌아오는 대로 남동학교를 개교했다. 그러나 일경으로부터 많은 간섭을 받아야했다. 넉넉하던 그의 경제력도 어려움에 처할 지경, 조만식선생을 위시하여 이상재선생 등이 그를 은밀히 후원하였다. 그분들이 기독교인이었기에 당시의 김길수는 많은 것을 느끼고 그의 나이 25세에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다.

그런데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다름 아닌 민족운동전개의 수단으로 기독교의 힘을 얻고자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도움을 받고자 함이었다. 그의 신앙이 깊어지며 그는 민족운동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복음전파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진남포 비석리교회 평양 남문밖교회와 신암교회 등지에서 전도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1942년 김길수는 37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신암교회로 부임하였다. 꿈에도 그리던 해방이 찾아왔다. 지하에 숨어있던 목사들은 뛸 듯이 기뻐하며 모여들어 교단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꿈에 불과했다.

교회는 다시 공산정권에 의해 박해받기에 이르렀다. 교역자들 사이에 세 가지 의견이 대두되었다. 첫째는 공산정권과 싸워서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자는 의견이고, 둘째는 무모한 도전보다는 월남을 하자는 의견이고, 셋째는 순수하게 신앙을 지키며 강단을 지키자는 의견이었다.

김길수목사는 첫 번째 의견을 지지했고,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조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3·1 기념예배를 드리고 주일날 개최되는 것에 반대하여 선거를 거부하는 등 김길수목사는 공산당에게 큰 장애물이 되었다.

1946년 공산정권의 설립이 확실해지자 당시 평양감리교회 이윤영목사가 월남을 간청했으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결국 6.25전쟁 전 정치보위부에 연행 되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로 떠났다.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내 김길수목사순교기념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