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덕 주 ( 黃 德 周 , 1903 ~ 1950 )

“하나님과 부모를 극진히 사랑한 순교자”
생년월일 : 1903년 3월 7일
출생지 : 강원도 원주
순교일 : 1950년 9월 26일
순교지 : 강원도 원주
직분 : 목사
교단 : 감리교


황덕주 목사는 1903년 3월 7일 강원도 원성군 문막면 반계리에서 부 황명준, 모 박명도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17세까지 한학을 공부하다가 늦게 보통학교에 가서 공부하게 되었다. 황덕주 목사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은 그 시점 즈음이었다. 보통학교 시절부터 문막 감리교회에 출석했고, 선교사로 온 베닝부인(Mrs.Banning)의 총애와 사랑으로 바른신앙을 알게 되었다. 또한 당시 감리교 남부연회의 중심도시인 공주의 영명학교에 입학하여 또래의 선생님들과 선교사님들로부터 성경과 영어와 음악을 배웠다.

이후 신학에 뜻을 두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평양신학교에 다니기 위해 고향을 떠날 때 그는 자녀뿐만 아니라 남동생과 누이도 대동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학업을 책임지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후 황덕주 목사는 1934년에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제 29회로 졸업하고 목회는 감리교에서 하였다. 그 때는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1933년 칠산교회를 담임했고, 1935년부터 신유리교회, 그 다음에는 다시 칠산교회를 담임했다. 1939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중화(中和)감리교회를 담임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일제 신사참배 거부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었다. 해방 후에는 평양 북원교회에서 대부분의 신도들이 월남하는 중에도 교회를 지키었다. 공산주의자들이 교회 벽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선전 문구를 빨간 글씨로 써 놓으면 황덕주 목사는 간밤에 지워 그것을 성경구절로 다시 써 놓았다.이후에는 핍박을 받아 투옥되었는데, 다행히 친구로 사귀고 있던 강양옥의 도움으로 3개월만에 출옥하고 곧 바로 월남하였다. 

황덕주 목사는 1947년 3월 월남하여 대전 제사공장 교무과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생사공장 여공들의 기도모임(한선학권사주도)을 발전시켜 대전지방 효동교회(현 남부교회) 설립하고 교회이름을 대전제일교회, 제이교회(현 선화감리

교회), 대전제삼교회로 하여 창립하였다. 이후 1949년 3월에는 대전형무소와 공주형무소의 원목(刑牧)으로 시무하였다.
그는 부지런함과 사랑 많음으로 인해 불우한 이웃들과 함께 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대가족을 이끌어야 했기에 넉넉하지 않은 생활인데도, 목회와 더불어 양봉 등의 일을 통해 번 돈, 부인의 삯 바느질 등을 통해 번 돈으로 약자를 위해 사용하였다. 정착하지 못한 월남민들을 위해 자애원을 만들고, 천막과 기구들을 사주며 식량도 나누어주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굶주린 자들을 보면 전도하며 그들에게 생활비 모두를 주곤하였다. 

그는 도한 효심이 대단하여 한때 중병에 걸린 아버지를 위해 손가락을 잘라 모자란 피를 대신하여 주기도 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하였을 당시 그는 먼 남쪽으로 대피할 수 있었는데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공주로 가서 어머니를 돌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순교의 길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공주시도 인민군에게 점령되자 아내와 어린 자녀 셋은 집에 두고, 반공단체인 전국학생연합의 간부로 현상 수배된 큰아들을 데리고 숨어 있었다. 그러나 숨어 지내던 중 고향의 어머니의 안위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8월 초순경 고향 원주 문막으로 가서 어머니를 만난 후에 인근 산에 숨어 있었다. 본래 황덕주 목사가 살던 마을은 씨족 공동체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서로 가깝고 먼 인척이었다. 그러나 몇몇 인척들이 노동당에 입당하였고 간부로 세워진 이도 있었다. 언급하기 어려운 어느 한 인척이 황덕주 목사를 고발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먼 인척이 황덕주 목사를 꾀어 내어 내무서에 수감시켰다. 그러나 1950년 9월 말 즈음 국군이 진격하면서 북한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퇴각하면서 집단 학살을 자행하였는데 나중에 학살현장을 확인해 보니 시신들이 부패하여 가까이 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중에 황덕주 목사의 큰 아들 황우혁이 황덕주 목사의 차림과 비슷한 시신을 찾아 옷을 제치니 황덕주 목사의 신분증과 사진, 설교수첩을 발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