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석 훈 ( 趙 錫 勳 , 1905 ~ 1950 )

“ 7남매 모두를 성업으로 대물림하다 ”
생년월일 : 1905년 9월 21일
출생지 : 황해도 송화군 율리면 세진리 288
순교일 : 1950년 10월 15일
순교지 : 황해도 은률군 이도면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조석훈은 1905년 황해도 송화군 율리면 세진리에서 조호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서당에 나가 한문을 읽었다. 먼저 예수를 믿은 어머니를 따라 윤리교회 나가면서 예수를 알게 되었으나 유학에 젖었던 부친으로부터는 호된 꾸짖음을 받았다.

조석훈은 나이가 들면서 재령으로 나가 재령고등성경학교에 입학했다. 학생이지만 20세가 넘었던 터라 학생시절부터 조사로 활동을 했다. 교역자가 없는 미자립교회인 장연군 태탄교회, 용현교회, 두현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성경학교 졸업 후 1929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무려 입학한지 16년 만에 1948년 44회로 신학을 졸업했다.

18년 동안이나 신학교를 다니게 된 것은 미자립교회를 떠돌며 목회를 하다 보니 학비도 여유가 없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신사참배를 할 수 없는 신앙 때문이었다. 시골교회를 담임하다보니 도시목사들에 비해서 어려운 시절에도 용케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1945년 해방 후 조목사는 1948년 졸업하고 황해노회에서 안수 받은 후 은율군 일도면 누리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고향 송화군 윤리면에서 조목사의 덕망이 돋보여 면장으로 부임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으나 더 유망한 이를 세우라는 말로 한마디로 거절하고 목회에만 집중하였다.

1950년 6.25가 나자 교인들에게 월남할 것을 권유하고 자신은 죽음을 각오하고 교인도 없는 누리교회의 강대를 지키며 기도생활로 교회를 사수하였다. 1950년 10월 15일 유엔군이 북으로 진격해 올 때 조목사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공산군으로부터 연행되었다. 조석훈목사는 지팡이에 의지해 절뚝거리며 소달구지에 타 외진 산모퉁이 한적한 풀숲 속에서 공산군의 총에 맞아 46세에 순교하였다.

조석훈목사의 아들 조유택원로목사

조석훈 목사의 유족 중 8명이 목사

조석훈목사가 남긴 7남매는 온전히 주의 제단에 바쳐져 아들 넷은 목사, 딸 둘은 목사부인, 딸 하나는 전도사가 되었다.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내 조석훈목사순교기념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