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진 현 ( 鄭 珍 鉉 , 1911 ~ 1950 )

“스데반과 같이 교회를 사랑한 순교자”
생년월일 : 1911년 4월 15일
출생지 : 황해도 은율
순교일 : 1950년 10월 14일
순교지 : 황해도 구월산
직분 : 장로
교단 : 장로교


정진현 장로는 1911년 4월 15일 황해도 은율읍 남부면 봉암리에서 태어났다. 정진현의 아버지는 아들을 입신양명 시키고자 한학을 배우게 하였고 나이 10세가 될 즈음 고향에서 4km정도 떨어져 있는 기독교 계통의 광산보통학교에 진학을 시켰다. 정진현은 이곳 학교를 다니게 됨으로서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고향에는 교회가 없어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계림교회에 열심히 출석하였다. 당시에 신앙이 없었던 정진현의 아버지는 바쁜 농촌에서 교회에 나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주일에도 많은 일을 시켰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정진현은 맡은 일을 토요일 밤 늦게까지 다 해놓고 교회에 출석하였다. 이런 부지런하고 신실한 행동에 감동이 된 정진현의 아버지는 아들이 교회에 자유롭게 나가도록 허락하였으며 나중에는 자신도 예수를 영접하였다. 또한 정진현은 일가친족과 고향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였다. 정진현이 20살이 되었을 때 항일독립운동 비밀조직에도 가담하여 독립운동에 동참하다가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정진현은 결혼을 한 후 농업을 접고 포목상을 하고자 하였다. 자신의 고향 은율에서 송화군 천동면 석탄리로 이사를 함으로 정진현의 삶의 터전은 바뀌게 되었다. 그곳에 있는 석탄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며 영수의 직분을 받았으며 여러 직분을 맡으면서도 충성하고 교역자를 섬기는 일에도 온 교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석탄리에 치안대가 조직 되었다. 정진현은 면 치안대 총무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하루는 공산당이 총을 들고 정진현 집에 찾아와 공산당에 협조하라고 하였으나 정진현은 나는 예수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을 주장하는 공산당에는 협조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정진현은 더 이상 석탄리에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는 10여년간 운영해 오던 상업을 정리하고 다시 고향 봉암리로 이사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정진현은 전에 섬기던 계림교회에 다시 출석하여 1946년 장로로 임직을 받은 후 담임 목사가 없는 교회에서 강단을 지키며 교인들을 살폈다. 성도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며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공산당에 협조하지 않는 정진현 장로를 공산당은 가만히 두지 않았다. 반동분자로 체포하여 해주교도소에 수감시켰다. 해주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부인이 면회를 와서 위로하였다. 그러자 정진현 장로는 오히려 교회와 가정을 걱정하며 나는 기도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교도소에서 수감된 지 1년이 지나 정진현 장로는 출옥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때 교회의 교인들과 가족 친지들은 출옥을 기뻐하면서도 북한치하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으니 월남할 것을 권유하였다. 교인들과 친척들의 권유를 받은 정진현 장로는 38선 경계선까지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도달하였지만 내가 월남하면 사랑하는 가정과 교인들은 누가 돌보아 줄 것인가, 이들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교회를 떠난 것을 회개한 정진현 장로는 이때부터 순교할 것을 각오하고 교인들과 함께 살기로 결단을 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북한 공산당은 교회를 접수하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폐쇄명령을 하였지만 정진현 장로는 내가 목숨이 붙어있는 한 교회 문을 닫을 수 없다고 항의하였다. 환란과 온갖 핍박이 닥쳐 올때마다 찬송가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를 부르며 그 고난을 이겨내었다. 기독교 박해가 점점 심해지는 상황 속에서 공산당은 말을 듣지 않는 정진현 장로를 체포하였으며 다시 감옥에 수감되었다. 정진현 장로를 포함하여 체포된 많은 목사와 장로들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심한 고문과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을 하자 공산당들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공산당은 수감되어 있던 목사와 장로들 쇠사슬로 결박하여 구월산(九月山) 계곡으로 끌고 가서 모두 총살하였다. 이때가 1950년 10월 14일, 정진현 장로의 나이 40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