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 태 ( 李 馬 太 , 1920 ~ 1950 )

“아버지의 신앙을 거룩하게 따른 순교자”
생년월일 : 1920년 5월 20일
출생지 : 전라북도 정읍
순교일 : 1950년 9월 26일
순교지 : 전라북도 전주
직분 : 전도사
교단 : 장로교


이마태는 1920년 5월 20일 전북 정읍군 불양면 대장리에서 이성열 집사의 4남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이성열 집사는 민족의식이 깊어 가까운 공립보통학교를 보내지 않고 부안군 백산면 대수리교회에서 하는 대성학교를 입학시켰다. 그가 대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의 아버지 이 집사가 왜경에게 붙잡혀 갔다. 신사참배를 않는다는 죄목이었다. 이 집사는 경찰서에서 치도곤으로 얻어맞고 귀가를 했다. 그때 맞은 상처가 깊어 회복하지 못하고 그는 하늘나라로 부르심을 받았다. 아버지의 순교는 이 전도사에게 종교 지도자가 되어야겠다는 모진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형님들의 도움을 받아 전주성경학교에 입학해 교역자가 되는 훈련을 쌓았다.

1944년 25세의 나이로 성경학교를 졸업한 그는 큰 형님 이주일 집사가 봉직하는 전북 부안군 동진면 오중리의 오중리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이 전도사는 열성적으로 목회에 임하여 오중리교회를 자립교회로 이끌어 나갔다. 해방후 전라도 지역엔 좌익계 청년들의 행패가 지역 행정을 어지럽혔다. 좌익 청년들은 불평 불만자들을 규합하여 관공서나 교회에 불을 놓기도 했고 지역 유지들을 테러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마침 부안지역에서는 부안교회 김수현 목사가 국민촉성회를 조직하고 좌익 청년들의 불법 행위에 대처했다. 국민촉성회 책임자들은 당연히 교회 교역자들이 많았다. 김수현 목사는 이마태 전도사에게 동진면을 책임져 달라고 친히 부탁했다. 이 전도사는 김 목사의 끈질긴 부탁으로 국민촉성회 동진면 위원장직을 맡았다. 자연 그는 공산당의 허구를 들춰내었고 좌익계 청년들을 설득해 국민촉성회에 가입시켰다.

1949년 이 전도사는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가면서 국민촉성회와 오중리교회를 사임했다. 신학교 2학년에 올라와 6.25사변이 일어나 학기를 마치지 못하고 가족이 있는 정읍군 앵생면 앵생리에 있는 앵생교회로 내려왔다. 이마태 전도사의 집은 이 전도사의 국민촉성회 위원장을 지낸 일로 인하여 반동가족으로 몰리었고 이 전도사는 동진면 내무서로 끌려가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 이 전도사는 얼마나 혹독하게 맞았던지 두 다리와 두 손목이 다 부러졌다. 이 전도사는 농장 창고에 갇혀 치료도 받지 못하고 짐승같은 대접을 받으며 몇 달을 지냈다. 그러다가 부안 경찰서를 거쳐 전주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50년 9월 26일, 이마태 전도사는 성직자, 우익인사들과 함께 전주형무소 뒤뜰로 끌려나가 죽창에 전신이 찔려 순교했다. 이때 이 전도사의 나이 갓 서른의 앳된 청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