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임 례 ( 尹 任 禮 , 1894 ~ 1950 )

“ 굳은 일을 도맡아하며 삶의 전도를 하다 ”
생년월일 : 1894년 7월 5일
출생지 : 전북 고읍군 신림면 무림리
순교일 : 1950년 10월 19일
순교지 : 전북 정읍시 소성면 애당리 두암마을
직분 : 집사
교단 : 성결교


윤임례는 1894년 7월 5일 전북 고읍군 신림면 무림리에서 윤병오의 2녀로 태어났다.

윤임례의 남편은 4남 1녀를 두고 32세가 되는 1936년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토속신앙과 불교신앙에 열심이었던 윤임례는 큰 아들의 전도로 예수 믿고 4킬로나 되는 천원교회에 매일 새벽기도회를 참석하였다. 아들 김용은이 두암교회를 세웠으나 성서학원에 다니면서 서울에서 신문사 지국을 경영하고 있었기에 윤임례집사가 교회를 도맡아 예배를 인도했다. 윤집사는 주일 심방, 새벽 심방, 수요 심방 등 계절과 요일, 시간에 관계없이 모범된 자세로 섬기었다.

윤집사는 보기 드문 효부로 큰집에서 모시는 시부모를 한 달에 두 번씩이나 초청해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시모가 돌아가시자 동년배 동네노인들까지 초청해서 음식을 대접했다. 주일날 대예배가 끝나면 그 동네 31가구를 위해 교회에서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을 찾아가 양식을 은밀히 갖다 주어 밥을 지을 수 있게 했다. 외딴집에서 홀로 남편의 시신을 지키던 홍순녀라는 여인을 도와 시신을 염습해 주는 등 굳은 일을 도맡아하여 홍순녀는 물론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켜 교회로 인도했다. 당시 두암 마을의 31가구 모두가 예수에 관심을 갖는 등 예수 믿는 마을로 변화되어가자 공산주의자들의 요시찰 지역으로 표적이 되고 말았다.

1950년 6.25동란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지방회로부터 고주교회로 부임하라는 파송령을 받고 준비 중 6.25가 터졌다. 그로인해 부임을 보류하고 두암교회를 지키던 중 공산당에 협조하지 않아 소환당해 예배를 금했으나 강행하자 30명의 무장 군인이 두암교회에 보내져 윤집사의 아들과 자부가 피투성이 되었다.

1950년 9월 21일 유엔군이 상륙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공산군은 우익인사들을 잡아가두기 시작했다. 큰아들 김용은전도사는 피신했으나 10월 11일 집요하게 수색을 해 김용은전도사의 동생 김용채집사가 총에 맞아 순교하였다.

일주일 후인 1950년 10월 19일 두암마을을 또 다시 습격하였고 윤집사가 마지막임을 느꼈을 때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를 찬송한 후 악도들에게 “나는 죽어서 천당에 가는데 당신들도 예수 믿기를 바라오.”라는 유언 아닌 복음전파를 한 후, 무릎 꿇고 기도하는 중에 칼을 맞고 쓰러져 57세에 순교했다. 조카들까지 목이 잘려 죽었고 집이 불태움 당하는 등 그날 순교한 윤임례집사를 비롯하여 아들 며느리 손자 등 23명이 집단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