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성 덕 ( 元 聖 德 , 1889 ~ 1950 )

“ 애국가를 가르치고 수감된 민족주의자 ”
생년월일 : 1889년 10월 7일
출생지 : 평안북도 구성군 관서면 조악동
순교일 : 1950년 12월
순교지 : 산 속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원성덕은 1889년 10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관서면 조악동에서 태어났다. 원선덕은 평북 선천읍에 있는 기독교 학교인신성학교를 다녔는데 이 학교는 1905년 미국 북 장로교 선교부와 함께 양전백 등에 의해 기독교 신앙교육과 개화자강(開化自强)의 이념으로 설립된 중등과정의 남자학교였다. 1909년 제1회 졸업생은 원성덕을 포함 모두 9명이었다.

원성덕은 평소에 꿈이었던 목사가 되기 위하여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 목사로 안수 받아 교회를 섬겼다. 원성덕목사는 구성면 면서기로 근무하던 중 1919년 3.1운동 때에 출신지인 평북 구성군의 유지들과 청년들에게 독립선언문을 친히 손으로 써서 등사하여 배포하였다. 원성덕의 애국적 행위에 감동받은 군민들은 4월 첫 구성장날을 택해 대대적으로 만세운동을 폈다.

원목사에 대한 일본 경찰의 체포명령과 원목사를 총살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가운데 현상금까지 걸린 수배자라는 전단지까지 뿌려졌다. 원목사는 친구 윤하영목사와 함께 고향마을의 금광 굴에 일단 몸을 숨겼다. 부인이 주위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준비해온 주먹밥을 끈을 달아 내리면 이 줄을 신호로 연락을 취하면서 목숨을 연명하였다.

원목사는 윤하영목사와 함께 일하다가 윤하영목사가 먼저 체포된 뒤 원목사도 곧 체포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으나 목숨은 건졌다. 출옥 후에 평신에 입학 1926년 19회로 졸업한 후 평북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사로서 구성 남시교회, 철산 연동교회, 원세평교회, 구성 신시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신사참배 거부와 창씨개명을 반대하였다.

1945년 8월 14일 어린이들에게 조선의 애국가를 가르침으로 반일감정을 고취했다고 일경에 체포되었으나 이튿날 해방을 맞아 출옥했다. 출옥 후 의주 영산교회를 섬겼다. 공산군은 원목사에게 애국자라는 표창을 주며 회유했으나 거부하자 요시찰인물로 일거수일투족 감시대상이 되었다.

1950년 6.25 공산군의 남침이 시작되었고 그때까지도 원목사는 온갖 어려움과 환난을 겪으며 계속 교회를 섬겼다. 공산당이 평양까지 버리고 패주하던 그 해 12월 북한 공산군은 완전히 손을 들어야 할 즈음, 중국 공산군의 한국전쟁개입이 시작되었다.

북한 공산당은 사태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슬리는 인물들은 누구를 불문하고 직결 처단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어 62세의 원목사를 체포하여 산으로 끌고 올라가 마치 옷을 찢듯이 원 목사의 사지를 찢어 죽였다. 그리고 바로 그날 부인과 가족 모두 함께 공산당에 의해 총살되니 이로써 원목사의 가족들은 영광스런 순교대열에 서게 되었다.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내 원성덕목사순교기념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