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창 근 ( 宋 昌 根 , 1898 ~ 1951 )

“ 조선신학교의 설립주체자 ”
생년월일 : 1898년 10월 5일
출생지 :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웅상동(몽새마을)
순교일 : 1951년 7월
순교지 : 납북
직분 : 목사
교단 : 기장


송창근은 1898년 10월 5일에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웅상동(몽새마을)에서 부친 송시택, 모친 신봉암 사이에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송창근의 가문은 대대로의 농가이며 보수성이 짙었으나 종숙 되는 송시명이 일찍이 개화하여 향리에 북일학교라는 신학교를 세우고 기독교도 먼저 받아들여 그 고장의 첫 교회도 세웠다.

송창근은 북일학교에서 공부하며 기독교에 접했다. 13세에는 19세의 신부 김재원과 결혼을 하고 15세에 종숙의 권고로 만주에 건너가 명종중학교에 입학, 졸업 후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상경하여 1915년에는 중등교육과 신학수업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피어선성경학교에 입학하였고 1920년 3월에 졸업했다.

이때 남대문교회 장로 및 조사이던 함태영이 3.1운동과 연루, 투옥되자 청년 송창근이 그 자리를 메우며 첫 목회를 시작했다. 주로 남대문교회가 뚝섬에 세운 전도소에 나가 활동했는데 이때 교인들에게 ‘독립운동가’를 유포시켰다는 죄목으로 일경에 투옥, 옥고를 치렀다.

1923년 9월 한때 방황하다 동양대학 문화학교에 입학했다. 1년 후에는 청산학원대학 신학부 2학년에 편입하고 1926년 졸업한다. 귀국한 송창근은 전영택목사가 주간한 한국의 기독교 유지들이 중심이 된 기독교 창문사발행의 기독교 종합잡지인 <신생명>에 관여했다.

송창근은 성프란시스코신학교에 적을 두었다가 곧 프린스턴신학교로 옮겼다. 1928년 9월에는 펜실베니아의 웨스턴신학교로 옮겨 1930년에 신학석사가 됐고, 1931년에 마침내 코로라도의 덴버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신학박사였으나 목사가 아닌 그는 귀국 후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있으며 숭실에서도 가르쳤다. 진보신학을 했다는 이유로 평양신학교에서는 가르치지 못하고 다만 그 기관지 <신학지남>에 새로운 신학사상을 논문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1932년 평양노회에서 시취, 안수 받고 한국 대표적 장로교회였던 산정현교회 담임목사가 됐다. 1936년 봄에는 산정현교회를 사임 부산으로 내려가 <성빈학사>를 설립, 사회사업에 몰두했다. 이때 김정준을 피택하여 <성빈>이라는 잡지를 내고 부산 일대에서 성서강좌를 통한 간접 목회에 큰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1937년 흥산단원이었던 송창근안 소위 <수양동우회사건>에 연루, 투옥되었고 4년의 실형선고를 받고 복역하다가 1939년도에 가석방되었다. 이때 송창근은 혹독한 고문과 심리적 갈등으로 쇠약해져 일제 강제의 조선기독교단 조직의 간부 경상북도 도청의 촉탁 역임, 신사참배의 용인 등을 통한 일종의 변절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 1939년 3월부터 조선신학교(현 한신대)의 설립주체가 되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조선신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서울 동자동에 바울교회(현 성남교회)를 설립하였다. 조선신학교의 총회 직영 파기선고가 진행되는 와중에 1950년 6.25사변이 일고 교회와 학교를 지키려던 송목사는 공산당에 이끌리어 납북되었다. 그 후 정확한 생사는 알 길 없으나 1962년 발표 <죽음의 세월>에 의하면 병약하던 송창근목사는 1951년 7월 경 평남 대동군 문성리에서 54세에 쓸쓸한 임종을 맞았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