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두 성 ( 徐 斗 成 , 1920 ~ 1950 )

“ 다재다능한 젊은 순교자 ”
생년월일 : 1920년 2월 11일(음)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순교일 : 1950년 수복직전
순교지 : 수원 근교 야산에서 살해순교
직분 : 목사
교단 : 성결교


서두성은 1920년 2월 11일(음)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에서 부친 서정원와 모친 최옥진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는 한편 독학으로 중학과정을 이수 후 향학열에 불타는 소년으로 마을 어른들께 칭찬받는 모범학생으로 소년기를 보냈다.

예수 믿는 노인 여집사의 인도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 노인집사의 외손녀인 독립문성결교회 이기남권사와 결혼하였다. 신혼집에서 멀지 않은 단양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서두성은 낮에는 농군, 밤에는 야학선생님, 마을 무료봉사 이발사, 주일에는 교회학교 교사, 청년회의 중추적인 역할 등을 하였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서울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신학생시절에 마포구 신수동의 신수동성결교회 전도사로 사역하였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1948년 11월 첫 부임지이자 마지막 사역지이기도 한 경기도 용인군 백암리 소재 백암 성결교회에 부임하여 목사안수를 받았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된 해로, 사상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혼란한 시국에 지방관서의 협조를 얻어 시국강연회를 얼어 공산주의의 이중성에 현혹되지 않게 노력했다.

서목사는 거리가 멀거나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할 수 없는 청소년들을 안타깝게 여겨 교회사택을 수리하여 교실을 만들고 서울에서 선생님을 초청하여 수업을 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백암중학교의 모체이다. 청년들의 의식개혁을 위하여 청년단을 조직하기도 하고 사경회 시국강연회 등을 열어 신앙을 바탕으로 한 확고부동한 국가관을 심어주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50년 6.25 전쟁으로 모두 피난을 떠날 때에 백암교회 신태원장로와 백암지서장이 자기들의 차로 후퇴하는 경찰관들과 함께 후퇴하자는 등 간곡한 권유를 하였으나 교회를 지키겠다며 교인과 숨죽이며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며 기도하던 중 그 지방 사람들이 체포당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내무서로 찾아가 교인(장로님과 청년 다수)들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감금되었다가 1주일 후 석방되었다.

석방 당시 “목사님께서 집에 계시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다시 체포하겠다.”한 말에 다수의 교인들이 몸을 피하기를 간곡히 권유하였지만 자신이 종적을 감추면 죄 없는 다수의 교인들이 다시 체포될 것이라며 사택에 머물다가 내무서로 연행되어 곧바로 서울로 압송되어가던 중 유엔군의 추격이 급박해지자 수원의 어느 야산에서 서두성목사는 31세에 살해되어 순교하였다.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내 서두성목사순교기념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