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 영 수 ( 邊 榮 守 , 1912 ~ 1950 )


“민족의식으로 나라를 깨우고자 한 순교자”
생년월일 : 1890년 12월 17일
출생지 : 충청남도 부여
순교일 : 1950년 8월 13일
순교지 : 충청남도 논산
직분 : 장로
교단 : 장로교



변영수장로는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에서 출생하였다. 변영수는 규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로서는 아무나 생각할 수 없었던 서울 유학을 하여 배제학당에 진학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귀한 뜻을 펴 보겠다고 전국에서 모여든 학생들 틈바구니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또한 채플시간만 되면 맨 앞자리에 앉아 교목의 설교를 들으면서 미래의 큰 꿈을 그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일제가 조선을 점령하자 일제는 농촌에 있는 조선의 지주들을 꾀어서 술과 화투로 세월을 보내도록 유혹을 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유혹에 변영수의 부친은 그만 속아 그 덫에 물리고 말았다. 이 일로 가산이 점점 기울자 더 이상 공부를 못하고 귀가하고 말았다.

그러나 변영수는 비록 농촌에 머물고 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혼자서 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한국 역사를 통독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러한 소문이 부여 규암에는 물론 부여 군까지 널리 퍼지면서 변영수는 민족주의 사상을 부르짖고 나섰다. 결국 이 일로 부여 경찰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강경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1년 8개월의 형이 확정되면서 군산형무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그는 비록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였지만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형이 만료되면 출소한다는 소망 하나를 갖고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드디어 형기를 다 마친 변영수는 고향 가까운 익산군 함열면 와리로 이사를 하고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계원식 장로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계원식 장로는 황등교회를 섬기고 있었고, 직업이 의사였기에 매주 토요일이면 무의촌에 나가 환자를 치료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그 계원식 장로를 만난 후 황동면 소재지에 있는 황등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본래 계원식 장로는 평안남도 평양 출신으로 일찍이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기성의원으로 개업을 하였다. 하지만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기금을 보냈던 일로 일본의 감사를 받자 전 가족을 이끌고 군산 구암 예수병원으로 이거를 하였고 익산 황등에까지 오게 되었다. 황등에서 기성의원을 개설하고 젊은 청년인 변영수를 만나 그에게 꿈과 이상을 심어 주었다. 이때 변영수는 계원식 장로의 희생적인 삶에 감동이 되어 자신도 계원식 장로처럼 살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1940년 28세의 젊은 나이로 황등교회의 장로로 택함을 받고 계원식 장로와 협력하면서 황등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그후 해방을 맞이하게 되자 변영수 장로는 평소에 갖고 있던 민족의식을 이때 바로 발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익산군 대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취임하였다. 익산군 대한청년단 단장으로 취임했던 변영수 장로는 독립된 대한민국을 더욱 빛내기 위해서는 청년들의 의식 구조를 변형시켜야 한다면서 각 면으로 순회하면서 강연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여기에 황등지역은 계원식 장로의 영향으로 계속 교회가 부흥이 되어 가고 있었으며, 12인조 관악대원을 조직하고 변영수 장로가 관악대 대장이 되어 각 면에 있는 지 교회를 순회하면서 열심이 전도 운동을 전개하였다. 교회는 날로 부흥 성장해 갔다.

그런데 6·25 사변이 일어났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있었고 변영수 장로는 익산군 시국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선출받았다. 인민군의 뜻하지 않는 남침으로 남한 각 지역은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혼란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 조직을 하고 각 면을 돌아다니면서 군민들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도록 강연을 하고 다녔다. 그러나 인민군이 대전을 점령하고 익산 가까이 올 무렵 부산으로 피난가자는 권유를 뿌리치고 익산을 지켰지만, 좌익인물들이 치안을 담당하면서 변영수 장로의 집과 재산은 모두 압수당하고 말았다. 추방당한 변영수 장로는 충남 부여 규암에 있는 아버지집으로 갔지만, 그해 8월 13일 충남 논산군 성동에 있는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조사를 받던 중 황등교회 장로였다는 사실과 미 제국주의에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총살형을 받고 순교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