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 호 ( 李 文 港 , 1914 ~ 1946 )

“공산당에게 순교의 제물이 된 강도사”
생년월일 : 1914년 5월 22일
출생지 : 경상북도 군위군 
순교일 : 1946년 10월 3일
순교지 : 경북 봉화군 
직분 : 강도사
교단 : 장로교


이문호 강도사는 1914년 5월 22일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상곡리355번지에서 착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교회집사였던 이진백(1913년 8월 14일:세례)과 배순이의 3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이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하고 겨우 끼니만 이어갈 정도의 가난하여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였으나 향학열을 포기할 수 없어 독학하여 지식을 쌓았다. 어릴 때부터 고향에 있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으며 1933년 4월 23일 학습을 받고 1935년 4월 7일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1937년 11월 8월일 23세의 나이에 고향 상곡교회에서 집사로 피택받아 교회를 착실히 섬겼다.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교회 집사로서 열심히 충성, 봉사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면서도 그는 앞으로 주의 종이되어 복음 사역의 길을 가고자 하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단신으로 대구로 나가 온갖 어려움 참아가며 틈틈이 독학하던 중 대구 동산성경학교에 입학하여 꿈을 실현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대구 동산성경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조선신학교에 입학하여 그토록 원하던 목회자의 길을 닦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좌익 사상을 가진 자들이 남한 여기저기에서 만행을 저질러 사회적으로 혼란하였으며 치안의 부재로 매우 불안한 시기였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일어난 10.1폭동 사건의 여파는 영천까지 밀려와 신령면에까지 폭도들이 날뛰고 잡아가고 때리고 죽이고 하는 피비린내 나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문호 강도사는 순교하기 전날 교인들과 함께 겨울 대비 교회에 필요한 땔감을 나르자고 의논을 하였다. 남자 교인들은 지게를 지고 이튿날 아침에 교회에 모이기로 하였다. 이튿날 작업을 하기 위하여 모두 모이기로 하였는데 시간이 되어도 모이지 않았다. 그날은 평소와는 달리 거리에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고 쥐 죽은 듯이 조용하였다. 벌써 공산 폭도들의 날리를 알고 많은 사람들이 피신하였다. 이문호 강도사는 그것도 모르고 일하려 갈 교인들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그런데 오전 10시 30분쯤 되어서 팔에 붉은 완장을 두른 청년 열댓명이 몰려 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뜸 이문호 강도사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서 끌고 가려는 것이었다. 평소 면식이 있는 젊은이도 있었고 심지어 교회 다니는 젊은 청년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 “내가 어딜 가느냐? 이유를 말하라.”라고 하니까 그 중에 우두머리가 “당신은 미제국주의의 앞잽이야 어서 끌어내”하면서 끌고 가는 것이였다. 이문호 강도사는 큰 소리로 “이놈들아 여기서 물러 가거라. 빨갱이들이 어디와서 횡패냐? 하면서 호통을 쳤지만 폭도들은 오히려 기세등등하며 막무가내였다. 이문호 강도사는 '올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방으로 들어가 작업복을 벗고 흰 모시 바지와 저고리 그리고 두루마기를 갈아입고 조용히 잠깐 동안 기도를 드리고 나서 폭도들에게 끌려갔다. 

폭도들은 그에게 수없는 고문과 폭행을 가했으며 예수를 부인하고 자기들과 같이 사회주의국가 건설에 동참할 것을 회유하였으나 그는 순교를 각오하고 그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 배척하였다. 이에 분개한 폭도들은 그의 몸을 무자비하게 짓밟았고 몽둥이를 휘둘러 참혹한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그의 나이 32세 젊은 나이에 순교의 제물이 되어 하나님 앞에 생애를 아름답게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