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 능 양 ( 沈 能 養 , 1896 ~ 1949 )

“ 안강육통교회를 순교로 지킨 신앙맹장 ”
생년월일 : 1896년 7월 16일
출생지 : 경북 월성군 단강읍 육통리
순교일 : 1949년 5월 25일
순교지 : 육통교회 정문 앞
직분 : 장로
교단 : 장로교(통합)


심능양은 1896년 7월 16일 부친 심덕규와 모친 손영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손이 귀했던 심씨 집안의 자식이 장가를 들어 몇 년이 흘러도 자손이 없자 시부모들의 간장을 태우던 차에 심능양의 조부는 예수만 믿으면 죽은 자도 다시 살린다는 설교를 듣고 맹의화선교사에게 예수만 믿으면 자신의 며느리도 애를 낳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힘 있는 전도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바로 며느리의 몸에 태기가 있게 하셨고 주의 축복으로 심능양이 태어났다.

심능양의 부친 심덕규는 유달리 민족의식이 강해 안강면에 사립학교인 기독교영창학교를 설립하고 한글과 성경과목을 함께 가르쳐 일제의 한국어말살정책에 항거하고 신앙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심장로는 부친과 함께 창마을 교회를 설립한 외에도 1933년 안강제일교회를 개척, 설립하였고 이어 그의 가족이 살고 있는 육통리에도 교회터를 내놓아 교회를 짓기도 했다. 심장로는 육통교회를 짓고 농사도 바빴지만 매일 동리로 나가 전도를 했고 교역자를 모실 수 없는 입장이 되자 친히 교역자가 되어 주일예배와 수요예배, 새벽기도회를 인도했다.

일제가 신사참배의 덫을 놓고 교회를 폐쇄시킬 때는 심장로는 몸을 더럽힐 수 없다고 산중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못질된 교회로 뛰어가 판자쪽을 떼어내고 들어가 강대상 앞에 엎드려 소리 높여 울었다.

해방 후 이승만정권은 심장로에게 안강면 국민회의 책임자로 임명했으나 관심이 없었고 전도대를 조직하여 북을 치며 황새마을. 못밑마을. 능골마을. 큰 육통마을 등을 돌아가며 전도활동을 했다.

해방된 지 3년이 되는 1948년 5월 육통교회 심능양장로의 둘째 아들 심의진집사가 안강면 대동청년단 단장 일을 보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공산당원들이 한밤중에 심장로의 집에 처 들어와 심의진을 내놓으라고 심장로의 내실방을 샅샅이 뒤졌으나 없자 온 식구들을 밖으로 끌고나와 심의진집사 밑에서 선전부장을 하고 있던 심장로의 조카 심만길에게 “심의진이 어디갔느냐? 밝히면 살려주겠다.”고 했으나 죽어도 모른다고 하자 죽창으로 난자질을 해댔고 심만길조카는 1948년 그 자리에서 살해당하였다.

심능양장로는 1949년 5월 26일 수요예배 인도 후 귀갓길에 연행되어 육통교회 정문 앞에서 칼과 죽창으로 살해되어 54세에 순교하였다. 그날 밤 예배 때 부른 폐회찬송 543장 '저 높은 곳을 향하여'는 심능양장로의 마지막 찬송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