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철 훈 ( 金 哲 勳 , 1905 ~ 1948 )

“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강직한 목회자 ”
생년월일 : 1905년 10월 7일
출생지 : 경기도 양평
순교일 : 1948년 6월 25일
순교지 : 서평양역 근처에서 납치되어 행방불명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김철훈은 1904년 10월 7일 경기도 양평에서 독립유공자 김경덕 목사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숭실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고학을 결심하고 평양을 택했다.

1930년 1월 21일과 22일 양일 숭실전문학교 종교부장이던 김철훈학생과 강태민학생이 주동이 되여 숭실전문학교 전교생과 평양시 12개교 학생이 참가하는 대규모학생만세사건을 일으켜 140여명이 검거되었다. 이때 김철훈의 1개월의 최초옥살이가 시작되었다. 고문 속에서 그는 예수를 만나는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한 후 평양신학교로 진학하였다.

1936년 3월 목사안수 후 숭실중학교 교목으로 채용되었으나 학생시절 평양 학생만세사건으로 옥살이 하던 자에게 학생을 맡길 수 없다는 이유로 수업 중 일본 경찰에 끌려가 숭실중학교 교목으로 부임 후 3개월 만에 면직되었다.

1936년 8월에 용강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년여 기간이 지났을 때 당국에서 교회 뜰에 일장기를 계양하고 예배 전에 일본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를 낭독하도록 강요한 것을 김철훈목사의 강직한 성격은 즉각 거절하고 그 교회를 사임하였다.

1938년 2월에 송산리교회 목사로 부임하여서 당시 일본 식민정책으로 조선인의 목을 조이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가혹한 옥고를 치루고 9개월 만에 출옥했다. 동년 11월 의성교회 시무했던 유재기 목사가 평양신학교 학생시절 배민수, 박학전, 송영길, 김철훈 등 10여명을 상대로 농우회(農友會)를 조직하고 졸업 후에도 이를 유지해왔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위장 단체라 하여 일경이 평소 감시하던 김목사를 농우회사건에 연루되었다하여 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국내 사정이 악화되어 만주로 가려고 시무하던 송산리교회까지 사임했다.

1939년 3월 삼성리교회 장로들의 간청에 이끌리어 삼성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지나던 중 1942년 3월에 성서조선 잡지 158호의 수필부분에 “조와”를 문제 삼아 폐간시킬 의도로 독자인 김목사를 그 잡지의 필화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의심하여 8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인 1945년 9월에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인 고당 조만식 옛 스승을 보필하게 되여 고당은 김목사를 밀사로 평남건국준비위원회의 공문을 휴대 월남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여운형선생을 만나는 중책을 맡았다.

1945년 10월에 800여명의 교인이 출석하는 동평양교회에 부임하였고 총회를 잠정 대행(통일될 때까지)하는 이북5도(16개 노회)교회연합회 서기를 맡아 연합사업을 했다. 1947년 강양욱은 기독교연맹을 조직 가입을 권고했으나 이를 거절하였고 동년 11월 3일 주일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기독교인을 앞장세우려 했으나 이북5도 회장 김진수목사와 김화식, 김길수, 김철훈목사 등이 반대하자 교회탄압에 광분하기 시작했다.

1948년 2월 김철훈목사는 사정이 어려운 산정현교회에 부임해 오직 교회의 부흥과 선교에만 매진하다가 그해 6월 25일 서평양역 근처에서 공산당에 체포당하여 어디론가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내 김철훈목사순교기념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