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병 조 ( 金 秉 祚 , 1877 ~ 1950 )

“ 애국운동에 몸 바친 33인 중 한사람 ”
생년월일 : 1877년 1월 10일
출생지 : 평북정주군동주면 봉명동
순교일 : 1950년 9일
순교지 : 시베리아에서 옥사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김병조는 1877년 1월 10일 평북정주군 동주면 봉명동에서 김경복씨의 3남 중 2남으로 출생했다. 신라계 김녕김씨의 경순왕의 36세 손으로 이곳에서 10대를 농업에 종사하며 집안이 매우 빈한했음에도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나 6세부터 서당에 보내 한학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사서삼경 제자백가를 통달 ‘찰방’으로 임명되었으나 거절하였다.

1896년 20세에 구성군 관서면 조악동에서 서당을 차려서 교육에 종사하다가 1901년 25세 때 구성군 방현면에 변산학교를 설립하고 1908년 기독교학교를 인수하고 교장이 되었다. 1909년 9월 김관조목사의 인도로 개종 1911년 1월 22일에 세례 받고 1917년에 졸업하고 동년 8월 19일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에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으로 서명 가담하였다. 김목사는 비밀조의 간부가 되기로 하고 애국인사를 해외로 망명시키기 위한 안동교통연락소를 만드는 일과 평북일원을 순회하며 각처에 만세를 부르라는 격문을 보내는 일을 담당하여 상복을 입고 방립을 쓰고 이웃교회 홍원범(해방 후 월남 영락교회 장로로시무)을 대동하고 임무를 수행하고 1919년 3월 25일 상해로 망명 4월 10일 상해 임시정부 수립 요인이 되었다. 상해 성인교회 담임 외교관계위원으로 국제연맹 청원안 작성위원을 하였으며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으로 한국독립운동사 및 한일관계 사료집 전4권을 저술하고 국민회의 비서장 선전위원회 이사 등을 맡았다.

1923년 패왕조교회와 화전자교회를 담임, 패왕조에 삼성소학교와 고등학교 화전자에 광명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대동역사를 저술하고 한족신문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1928년에 목단강 팔면통교회로옮겨 신일소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취임, 마적들에게 두번이나 납치되어 고초를 당했고 공산당의 습격 등 무수한 고통을 당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나자 귀국하여 애국정신을 고취하기로 하고 1933년 귀국 8.15해방까지 동상. 북평. 신서교회를 담임 경신학교 경영하였다.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일본에 협력하겠다는 자술서 거부 요시찰인물로 규정 금족령이 내렸으며 신사참배 반대로 해방까지 은둔생활하였다. 해방 후 소련군 사령관이 조만식과 김병조를 부르는 특사가 왔지만 거절하고 조만식장로와 반공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반공 광복단을 조직하여 소비조합과 철도파괴 등 조직망으로 교회를 통하여 반공, 살포 등을 전개하였다.

1946년 12월 24일 체포당한 후 1947년 2월 20일 소련으로 유형 당했다. 수용소에서도 예배드리고 애국이나 신앙에 관하여 항상 교훈하였다. 1949년 8월 어느 날 칸막이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떠났고 1950년 봄 다른 곳으로 끌려갔다가 쓰러져 돌아왔으나 기운을 회복하니 다시 어디론가 끌러간 얼마 후 1950년 9월에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