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경 희 ( 韓 敬 禧 , 1881 ~ 1934 )

“ 노영 오소리 강 밑으로 사라진 순교자 ”
생년월일 : 1881년
출생지 : 평북 의주
순교일 : 1935년 1월
순교지 : 만주 흑룡강성 오소리강소목하강 밑으로 수장
직분 : 목사
교단 : 장로교


한경희는 1881년 평북 의주에서 부호로 권세를 부리던 한승주의 3남으로 태어났다. 한경희 7세에 부친이 사망하여 가세가 기울어지자 형제들이 사업에 어느 정도 성공기반을 잡는 듯 하더니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모조리 잃어버리고 퇴락을 했다. 갑자기 평민으로 전락되자 한경의를 포함한 형제들은 유명한 싸움꾼으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서양전도인만 보면 행패를 부리고 싶어 안달난 한경의는 23세에 기독교회의 영수였던 친구 송문정이 하룻밤 함께 자다가 두고 간 ⌜구세론⌟이란 책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형제들의 반대와 구타에도 불구하고 믿은 지 3년 만에 세례를 받았다. 3개의 교회를 개척한 열성파였지만 교역자로 부족함을 느끼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7회로 졸업하고 평북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노회파송을 받아 외지선교사가 되어 길림성으로 갔다.

길림교회에 정착해서 선교와 동시에 조선족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특히 조선인의 생활지위문제에 착안하여 잘사는 것이 힘이라고 믿고 농무상무의 조합을 만들어 저축생활을 권장했고 중국관헌들과 교섭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농지마련 등 실생활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교육을 통한 한경의의 민족의식고취는 조선족동포들에게는 구세주의 목소리로 들렸으나 일인 통치자들에겐 반골독립투사로 비쳐졌다. 남만노회장으로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몇 차례의 마적의 습격을 받고 살림이 탈취됐고 5회나 일경의 심사를 받아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돼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형무소에서 출소해 1935년 1월 1일 위험한 호림현 지방 전도순방을 출발하여 무림교회에서 설교하였다. 김창근 등 재직 4인과 함께 설차(눈썰매)를 타고 오소리강변 요하현으로 전진하다가 1월 4일 공산비적에게 잡혔다. 북만주 사정을 잘 아는 이학인목사는 호림지구의 전도가 위험함을 말하여 진출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한목사는 “만주 순교는 나의 소원이라.”고 말하며 떠났다.

한목사 일행을 붙잡은 50명의 공비 중 중국인 공비는 천 원을 요구하였다. 한목사가 목사인 것을 확인한 공비들로부터 한목사와 김창근영수는 실신할 정도로 맞고 총살당하여 얼어붙은 오소리강 얼음구멍 속에 밀어 넣어졌다. 그때 일행 중 유일한 생존자 이낙섭이 증언하길 한경의목사는 "오- 주여, 이 작은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세 번 외쳤다고 한다. 이렇게 한경의목사는 55세에 순교하였다.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내 한경희목사순교기념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