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병 규 ( 李 炳 奎 , 1896 ~ 1945 )

“ 백절불굴의 신앙으로 신사참배 결사반대 ”
생년월일 : 1896년 9월 30일
출생지 : 평안북도 의주군 주내면 홍북동 261번지
순교일 : 1945년 8월 3일
순교지 : 해주형무소
직분 : 안수집사
교단 : 장로교


이병규는 1897년 9월 30일 평안북도 의주군 주내면 홍북동 261번지에서 이창석의 독자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의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병규는 청년시절 늑막염으로 도립병원에서 투병 중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의주서교회를 찾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큰 은혜며 축복임을 의심치 않고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 받고 은혜 충만한 가운데 교회출석을 결심하고 교회를 열심히 섬기어 의주서교회의 안수집사로 장립되었다. 이병규집사의 성품은 청렴결백하였으며 가산이 넉넉했어도 극히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1938년 9월에 평양으로 처소를 옮겨 당시 미국선교사 마두원목사를 찾아가 난국에 대비하여 김린희전도사, 안이숙여사 등과 함께 성경강의를 받았다. 이를 통해 한국교역자들의 어려움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마태복음 25:40-42 말씀이 이집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신사참배반대로 옥고를 치르는 분들을 뒤에서 돕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라 생각하여 그분들을 돕기로 결심하였다. 부인 장병의 권사와 의논하여 신사참배반대를 하다가 평양형무소에 복역하던 최봉성목사, 안이숙여사와 만주 봉천형무소에 복역하던 박의흠전도사, 김윤섭전도사, 전봉성전도사 등에게 침식을 제공하고 유족들의 생활비까지 제공하였다.

1940년 이기선목사가 심방하여 가르쳐준 다니엘서 3장 강론을 들으며 육신의 구차한 삶보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것이 영광임을 다짐했다. 1940년 음력 5월 5일 단오에 의주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의주형무소, 평양형무소, 해주형무소로 옮기었는데 옥중에서도 이집사는 신사참배, 궁성요배의 결사반대를 외쳤다.

고춧가루가 코에 넣어지고 거꾸로 매달려 채찍으로 맞고 손가락사이에 나무꼬챙이를 끼워 비빔당하고 전기고문과 옥죄이는 수갑형 등으로 피고름과 구덕기가 생기고 추운겨울에 피골이 상접한 처절한 이집사의 모습에 면회 간 사모와 두 딸은 입술을 깨물었다. 면회와 걱정하는 식구들에게 “내가 있는 곳이 곧 천국이니 내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시오.”라며 위로하였다.

이집사는 함께 수감되었던 세 사람에게 “죽도록 충성”이라는 이 한마디로 힘을 주곤 하였다. 각박한 일본인 형무소소장도 각종 고문을 가해도 굴하지 않고 더 강해지는 모습을 보고 이집사에게 “죄수 이병규는 살아 움직이는 신”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가혹한 고문이 계속되었고 이병규집사는 49세에 1945년 8월 3일 해주형무소에서 순교하였다.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내 이병규집사순교기념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