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관 준 ( 朴 寬 俊 , 1875 ~ 1945 )

“ 한국인의 기개를 떨친 ‘조선의 엘리야’ ”
생년월일 : 1875년 4월 13일
출생지 : 평북 영변
순교일 : 1945년 3월 13일
순교지 : 평양 기독병원
직분 : 장로
교단 : 


박관준은 1875년 4월 13일 평북 영변에서 토호 박치환의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평탄했던 그의 인생은 1894년 일어난 청일전쟁으로 재산을 모두 잃는 첫 번째 파란을 맞았고, 이를 어렵게 극복하여 다시 거부의 반열에 들었으나 아내의 유산, 부모의 별세로 두 번째 시련을 겪었다. 그리고 주색에 탐닉하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고, 병에 걸려 죽을듯한 고비를 여러 차례 넘나들었다. 

1905년 박관준이 30세일 때 책을 읽던 중 하늘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 “십자가 종교에 들어가라.” 박관준은 이것을 하나님의 소리로 듣고 그날로 기독교로 개종했다. 갑작스러운 체험을 통해 신앙을 받아들인 박관준의 믿음은 뜨거웠다. 지난날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했다. 

1910년에 벌어진 일제의 강제병탄은 박관준에게 시골에서 한가롭게 농사만 지을 게 아니라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의학을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로 올라와 각고의 노력을 다한 끝에 1915년에 의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민중을 살린다는 의미로 제중의원을 세워 병든 이들을 고쳤고, 아울러 의료를 통해 전도하기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박관준은 동네에 소학교와 예배당을 지어 스스로 예배를 인도했다. 

박관준은 개천에서 십자의원을 열고 생활하던 1934년에 개천읍교회에서 장로가 되었으며, 이후 평양을 거쳐 고향인 영변에 정착했다. 1935년 어느 날 밤 박장로가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다. 흰옷을 입은 천사 같은 이가 나타나 “나를 위해 피를 흘릴 자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었다. 이에 그가 대답했다. “제가 피를 흘리겠나이다.” 환상에서 깨어난 후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헌신해야 할 것을 명령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환상에서 깨어난 후 박장로는 유독 교회를 향한 신사참배강요가 심한 평양을 향해 떠났다. 박장로는 신사참배를 막기 위해 총독과 도지사에게 반대격문을 썼으나 일제에 의해 예비검속 되어 격문은 빼앗겼고 형무소에 갇히고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버티던 장로교 총회마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는 소식을 형무소에서 듣게 되었다. 

박관준 장로는 석방된 후에도 2년 동안 12차례에 걸쳐 총독에게 충고문을 보냈고, 미나미총독을 직접 찾아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성과가 없자 박장로는 안이숙선생을 찾아가 함께 일본에 가서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할 것을 권유했다. 

일본에 온 두 사람은 일본에 유학중이던 아들 박영창과 함께 일본 각계 지도자들을 만나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설명했다. 일부 일본지식인들이 취지에는 공감했으나 투쟁에 동참하는 것에는 난색을 표했다. 결국, 박장로와 아이숙선생은 이를 널리 알릴 방법으로 마침 동경에서 열리고 있는 일본제국의회(중의원) 회의에 방청하면서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고발하는 격문을 뿌리기로 하였다. 

1939년 3월 24일, 일본제국의회 의장이 제74회 회의가 개회됨을 선언하는 순간, 방청석에서 큰 고함 소리가 들렸다. ‘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이다.’ 그리고 수백 장의 격문이 회의장에 뿌려졌다. 제국의회장은 난장판이 되었고, 세 사람은 경찰에 연행됐다. 약 40일 동안의 취조를 당한 후 세 사람은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비록 수감은 당하지 않았으나 고향에 연금된 상태나 마찬가지로 일제의 감시를 받아야했다. 

1941년 봄, 영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신의주교도소를 거쳐 평양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교도소에서도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신사참배가 죄임을 역설했고, 일본의 패망을 예언했다. 

1945년 1월, 박장로는 70일을 작정하고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70일 금식을 마친 1945년 3월 11일, 일제는 박장로를 평양기독병원으로 내보냈다. 오랜 금식으로 이미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가족과 안이숙선생 등 지인들 앞에게 디모데후서 4장 7~8절과 이사야서 11장 10~16절을 읽어달라고 부탁하며, 이를 유언으로 남기고 1945년 3월 13일 오전 10시 평양기독병원에서 순교했다.

박관준장로 추모비 및 비문

박관준장로 순교기념비문

박관준장로가 신사참배반대운동을 했던 일본국회건물(東京都千代田區 永田町1-7-1 )

⌜순교자 박관준 장로 일대기⌟ 박영창(아들) 지음 두란노

순교자 박관준 장로의 아들 박영창 목사(좌)